이불 ‘시작’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지금은 세계 미술계에서도 높은 명성을 갖고 있는 이불 작가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이불 작가를 처음 알게된 것은 20년도 더 되었고,

어떤 신문에서 작가가 MoMA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기사가 났을 때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 중에

인형 머리 세 개를 이어붙인 수영복 혹은 레슬링복 같은 차림을 하고

머리와 옷에는 스팽글로 군데군데 장식했던 것이 유치한 듯하면서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얼마 뒤, MoMA에서 열렸던 전시회에서 작품 중에 생선 썩은내가 진동하여 전시를 중단했다는 기사로 더욱 이 작가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처음 알게 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현대미술은 잘 모르지만 이불 작가의 작품은 시간이 되는대로 챙겨보고 있고,

내심 응원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전시실 외부 벽에 있던 전시회 로고.

시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불 작가가 1980~90년대에 활동했던 시절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름 '불'은 이른 새벽의 뜻을 가진 한자어로, 작가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내부 촬영이 허용된 1 전시실에 있던 작품들.

왼쪽의 작품은 <몬스터:핑크>, 오른쪽 작품은 <무제(갈망 블랙)>이다.

천과 솜을 소재로 한 소프트 조각으로, 조각은 딱딱한 소재로 만든다는 고정관념을 깬 작품이기도 하다.

몬스터 핑크는 무슨 괴물의 촉수 같기도 하고 그리고 갈망 블랙은 사람의 몸통 같으면서도 기괴하다. 

 

 

 

 

 

 

그리고 <몬스터:핑크>의 왼쪽으로 보이는 작품은 <무제(갈망 레드)>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1988년에 만든 것으로, 초창기 이불 작가의 소프트 조각들에 해당된다.

 

그리고 촬영이 금지된 전시실 두 곳이 있다.

 

2 전시실에는 작가가 했던 행위예술 영상 10개가 벽을 마주보고 연속으로 상영되었다.

이불 작가가 나체로 벽에 거꾸로 매달려 스스로 작품이 되었던 <낙태>와

직접 만든 소프트 조각을 걸치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거리공연을 했던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인줄 아느냐?>와

현재 전시 홍보 포스터에도 나오는 <아토일렛> 등의 영상이 있다.

당시에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억압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한복차림에 방독면을 쓰고 부채춤을 추는 사람으로, 기괴한 소프트 조각 등으로 표헌한 것이 지금도 충격적이었다.

 

3 전시실에는 작가가 작업했던 당시 사진이나 드로잉, 기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 전시실이 가장 반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불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작품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MoMA에서 생선 썩은 냄새 때문에 전시를 중단해야 했던 '장엄한 광채'에 쓰였던 생선에 장식했던 구슬과 시퀸도 있었고,

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초창기 작품들에 해당되고 내게 이불을 각인시킨 것들이기도 했다.

구슬과 시퀸(보통 말하는 스팽글)은 우리네 족두리와도 같은 장식에 쓰이면 참 예쁘다.

그러나 이불이 만든 작품 속에서 철사에 꿰어진 구슬과 시퀸은 섬뜩하면서도 기괴하다.

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이 소재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떤 현상의 양면성 혹은 다면성을 느꼈다.

세상을 살면서 예쁘고 고운 것들만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들이 어찌보면 더욱 위선적이고 가공할만한 것으로 변모하기도 해서일까.

그래서 이불의 작품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고, 지금은 초기와 좀 달라진 양상을 보이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갈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이매진'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차고 넘쳐 폭발할 것 같은 때 월별로 이 잡지를 사서 읽는 것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언젠가 신년호에 이영애를 모델로 한 이불의 작품이 표지에 실린 적이 있다.

이 작품 역시 구슬과 시퀸이 소재이고, 지금 전시회에도 전시되어 있다(스포일러라 더 이상은 말하지 않을 것임!).

그리고 이불 작가가 작품을 만들기 전 구상을 그렸던 드로잉을 보면 의외로 귀여운 그림들이 나오고

메모를 보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작업에 임했는지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미술관 로비에 있던 '히드라'인데, 발판을 밟아 바람을 불어야 모양이 완성되는 풍선 형태의 작품이다.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그 모습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1990년대에 만들었는데, 최근에 이런 형태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히드라가 있던 벽면에는 백남준의 '서울랩소디'가 반짝거린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미술관을 떠날 차례... 그런데 비가 많이 온다.

 

 

 

 

 

 

미술관을 나섰는데 비는 생각보다 많이 왔고 비에 젖은 나무들은 싱그러워 보였다.

하지만 비가 와서 썰렁했다...

 

 

 

 

 

 

잠깐 비도 피할 겸 정동에 있는 카페로 피신할까 하고 생각을 했다.

르 풀은 좀 멀고, 전광수 커피하우스는 가봤고,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멀지 않은 곳에 라운드앤드가 보여 여기로 갔다.

사실 인스타그램에서 라운드앤드 계정을 팔로우 해놓고 언제 갈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던 것은 안 비밀...

전시회를 보기 전에 던킨에서 샌드위치와 쥬스를 먹어 속이 좀 든든해서 쿠키나 스콘이나 빵은 무리다 싶어

라즈베리 휘낭시에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앉아있던 자리 벽면에는 머그잔과 원두를 가지런히도 쟁여놓았고,

자리 옆에는 큰 스피커가 두개나 있었지만 과하게 시끄럽지 않고 소리가 정말 좋았다.

아마도 비싼 제품인 것 같은데 비오는 날에 카페에서 운치있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게 참 오랜만이다.

그리고 라즈베리 휘낭시에는 라즈베리의 새콤한 맛이 나서 좋았고,

진한 것 같았던 아메리카노는 식으니 약간의 산미가 느껴졌다.

봄철에는 적당히 산미가 있는 원두를 마시면 상큼해서 좋다.

 

카페를 나서니 비가 가랑비 정도로 적게 왔다.

슬슬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정거장으로 갈 차례...

모처럼 좋은 구경을 했다.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라운드앤드